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문단 편집) ===== 경제지표 ===== 피노체트 시기의 경제지표를 논하자면 다음과 같다.([[https://www.imf.org/external/pubs/ft/wp/2011/wp11252.pdf|pdf 문서]]) 실업률은 80년대 당시 위기를 겪으면서 20%대로 급상승했지만, 80년대 피노체트 정권 말년에는 10% 밑으로 겨우 회복되었고, 민주화 이후 90년대 중반에 6%대로 내려갔다가 10%대로 다시 올라갔다. 실질임금은 오히려 아옌데 시절보다 낮아졌지만, 피노체트 당시의 경제 성장률만 놓고 보자면 70년대 초 아옌데 시절의 경제성장률보다 높았다.[* 이에 대해 비판론자들은 미국의 비합리적 경제 탄압과 역으로 비합리적 지원을 받은 정권을 비교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라 하고, 옹호론자들은 피노체트 역시 80년대 초 외채위기를 겪었기에 외부 상황이 마냥 순조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고 옹호를 치기도 한다.] 그리고 물가상승률은 아옌데 정권 시기에 비해서 놀라울 정도로 억제되었는데, 이는 초기에 피노체트가 경제를 통제하면서 인플레이션을 제어하기 위해 고정환율제를 펼친 것에서 기인한다.[* 당시 재정부 장관은 시카고 학파였지만, 정작 프리드먼을 위시한 다른 시카고 학파 경제학자들은 고정환율제를 반대했고 변동환율제 이행을 촉구했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시카고 학파의 주문사항을 성실하게 이행한 사람은 시카고대 출신이 아니라 케임브리지대 출신 재무장관이었다. 이 때문에 사실 칠레에서 소위 시카고 보이즈가 주류를 점하고 활약하게 된 때는 80년대 경제위기 극복 과정 이후부터란 주장도 있는데, 알아서 판단할 부분이다.] 그 결과 1974년에는 504.7%였던 물가상승률이 4년 뒤인 1978년에는 40.1%가 되었으며, 또 4년 뒤인 1982년에는 9.9%가 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다. 다만 이게 상승과 하락을 반복했다가 피노체트가 퇴임한 1990년에는 26%로 상승했다. 물론 26%의 물가상승률도 상당히 높긴 하지만, 처음 집권햇을 때에 비하면 무려 7.4% 비율로 줄어든 것이다.[* 참고로 이후 칠레의 물가상승률은 상승과 하락을 반복한 끝에 2021년 현재에는 3.5%로, 이는 피노체트가 집권한 해의 '''1% 미만'''이다.] 그리고 피노체트 퇴임 직후 1년이 지난 1991년에 칠레의 국가 부채는 GDP의 37.4%였는데, 사실 이것도 아옌데 시절보다는 훨씬 낮아진 거다. 그리고 공공 저택도 사유 재산으로 보고 강력하게 방어하며 주택 건설도 민간 건설 회사가 저소득 가정을 위한 주택 보조금 시스템으로 자금을 조달하여 짓게 하였으며, 1977년에 여러 국영 기업들을 통합해 만든 국립 위생 공사 서비스(SENDOS)는 민간 기업에 서비스를 점진적으로 아웃소싱하고 구조조정하는 방식으로 하수 처리율과 식수 접근성도 놀랄 정도로 좋아지게 만들었다.[* 1974년부터 1990년까지 도시의 하수 처리율은 35%에서 75%로, 도시 가정의 식수 접근성은 60%에서 95%로 증가했다.] 또 평균 수명에 관해서는 1970년의 64.8세부터 1985년의 68.3세로 증가했고, 유아사망률은 1970년과 1985년을 비교해볼때 1000명당 82.2명에서 19.5명으로 하락하며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최저치를 기록하게 되었다.[* 다만 이는 상술한 무식하다시피 한 강제 입양 정책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피노체트는 육로를 통한 칠레 남부로의 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대통령이 되기 전에 지정학의 대가로 유명했던 경험을 살려 1976년부터 오스트랄 도로(Carretera Austral)라는 약 1240km 길이의 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고속도로는 칠레 중부 로스 라고스의 푸에르토 몬트와 칠레 남부 아이센의 빌라 오이긴스를 이었는데, 빌라 오이긴스 지역은 [[냉대기후]]였기 때문에 오스트랄 도로의 개통 전까지는 해로와 항로를 통한 접근도 어려울 정도였으며,[* 지금도 복잡한 지형 때문에 대부분의 경로가 운영 중임에도 보수가 잦다고 한다.] 심지어 오스트랄 도로는 416km 정도의 [[경부고속도로]]의 약 3배나 되는 엄청난 길이였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3억 달러에 가까운 비용과 1만 명 이상의 군인을 동원해서 1988년에 '칠레 역사상 가장 비싸고 어려운 작업'을 완성했다. 그리고 1982년 10월에는 가장을 위한 직업 프로그램(POJH)라는 시립 고용 프로그램을 만들어 극빈층 가정을 돕기 위해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23.7%에 달하는 실업률을 20%까지로 줄인다는 계획을 짜기도 했다. 비록 광장 청소나 벽 페인팅 등 비효율적인 저임금 업무 위주로 편성되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여하튼 이 정책은 1984년에만 약 20만 8천명의 직원을 고용하는 등 나름 성공적으로 운영되기는 했다. 이후 1988년 12월에 국가 경제가 안정되었다고 판단되어 해체되었다. 그러나 소득분배 관련 지표의 경우는 대부분이 아옌데 시절보다 악화되었다. 이는 공공부문에 대한 지출 축소, 각종 복지정책의 후퇴, 그리고 80년대 외채쇼크 등에 기인한다. 특히 의료와 교육부문의 부실화는 지금까지도 과도한 교육비와 의료비 부담 등 많은 사회문제를 안고 있으며 [[칠레]]의 빈부격차 문제를 지속시키고 있다고 평가될 정도다. 피노체트 군사정권 당시 이뤄졌던 공공지출 감소와 무분별한 민영화는 빈부격차를 증가시키고, 칠레의 [[복지]] 수준을 나락으로 이끄는 등 부정적인 영향에 한몫 했다. 현재 칠레의 GDP 대비 1인당 교육비 지출이 대한민국을 넘어섰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고, 의료계급화도 뿌리박혀서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일이 종종 생기고는 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222583|관련기사]]. 그나마 빈곤율 자체는 상기했듯 87년의 45%부터 90년까지 38%로 하락한 것을 시작으로[* 참고로 1986년까지의 정확한 빈곤율 수치는 불명인데, 이는 피노체트 정권 시대의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지표의 통계가 칠레 정부의 웹 사이트에서도, 유엔 등의 국제 기관의 웹 사이트에서도 나와 있지 않아 검증이 어렵기 때문이다.(일반적으로 독재 정권 하의 국가적, 사회적 통계는 비공개 상태라고 한다.)] 민주화 이후에도 콘세르타시온 정권이 최저소득계층에 대한 복지를 강화하면서 급락했다. 그런데 피노체트의 경제 성과들은 국민들에게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빈부격차는 심해졌고, 80년대 중반까지 빈곤율은 아옌데 시기보다 '''2배'''나 늘었으며[* 아옌데 시기 빈곤율이 85%였다는 자료도 있긴 하지만, 빈곤율이 85%라는 것은 웬만한 아프리카의 파탄국가도 달성하지 못한 수치이므로 나름 중견국가였던 아옌데 시기 빈곤율이 85%였다는 것은 신빙성이 전무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생활이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다.[* 실제로 칠레가 1973년의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을 회복한 것은 1990년대 말에 들어와서였다.] 애당초 피노체트는 "부자들은 부를 창출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계속해서 부를 줄 수 있도록 그들을 잘 대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남긴 것처럼 빈부격차 해소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